2013. 6. 24. 23:33ㆍ충청남도/공주시
공주터미널에 내리면(금호터미널 말고) 도보로 5분정도 가다보면 공산성이 보인다. 공산성은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인 웅진시대의 도읍지의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 성곽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불리웠고,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시대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웠다.
네 곳의 문 터 중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고 동, 서문은 1993년 복원하여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공산성을 강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한자 公자와 같다하여 공산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높이는 해발 110m로 백제시대의 토성 400m, 조선시대 석성 2,260m, 총 둘레 2,660m의 포곡형 산성이라 한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지와 연못 2개소가 발굴되었고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인조대왕이 머물렀던 쌍수정, 임진난시 승병들을 훈련시켰던 영은사, 찬란했던 백제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임류각, 그 밖에 만하루, 진남루, 공북루, 명국삼장비 등 많은 역사 문화가 있다고 티켓 뒷면에 쓰여 있다.
공산성 정문으로 올라오면 금서루가 보인다. 앞에 기술하였듯이 1993년 복원한 서문으로 당시의 위용을 엿볼 수 있게 만들어져있다. 특히 성루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하여서 성문 위에서 보는 경치도 볼 수 있어서 좋다.
국궁 체험하는 곳.
공산성은 성벽을 따라 길이 닦여 있다. 산성 절벽을 따라 나있는 길이어서 음주자는 통행을 못하도록 장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하나 아쉬운 것은 이왕 복원하는 김에 길도 옛날 모양처럼 복원했으면 더욱 느낌이 살아났을 것 같다.
성 안쪽으로는 산책을 할 수 있도록 길이 (너무) 잘 닦여 있다.
공산성 배치도. 얼핏보면 함경도 지방 모양 같다.
이 비석은 쌍수정 사적비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5박 6일간의 내용을 새긴 비문이라고 한다. 이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으로 글씨는 숙종때 여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썼다고 한다.
- 이괄의 난 더 보기(http://hwannyhistory.tistory.com/entry/%EC%9D%B4%EA%B4%84%EC%9D%98-%EB%82%9C1624%EB%85%84)
이 곳이 웅진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큰 건물터와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연못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직후 만든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깊이가 3m정도지만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 지름이 4.78m로 상당히 큰 연못이다. 안쪽에 쓰레기가 하나 보이는게 아쉽다.
다음 사진은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공주 시내이다. 진남루 인근에서 찍은 사진으로 공주 시내가 훤하게 잘 보인다.
아래 보이는 누각은 만하루로 조선 영조때 지어진 누각이다. 군사적 기능 외에 경치를 관람하는 용도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뒤에 보이는 강은 금강이다.
만하루 바로 위에는 연못이 있다. 앞서 보았던 연못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의 연못으로 바닥까지 계단이 나 있는 것이 신기하다. 특히 이 연못은 산성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산성 중간에 개구멍이 있는 것도 또한 재미있다.
만하루 안에서 바라본 풍경
이곳은 잠종냉장고로 일제시대(1915년)때 만들어진 냉장고이다. 일반적으로 누에가 알 상태로 월동을 하다가 4월 중순부터 부화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뽕잎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시기는 5월달로 그때까지 부화시기를 늦추기 위하여 저온 보관을 하던 곳이라 한다. 겨울에 금강이 얼었을 때 그 얼음을 넣었다고 한다.
지금은 앞이 막혀 있는데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가 젋으셨을 때 까지는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성 중간에 있는 공터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옛날 군사시설이나 막사 등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공산성을 나오면 바로 밖에 멋드러진 문이 있다. 개선문이나 독립문 등을 모티브로 만든 것 같은데 이왕 만들것이면 공북루나 진남루 처럼 백제 성문처럼 만들었으면 더 멋있고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2013.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