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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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 역사 태종대는 신라 29대 임금이자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전국을 순회하던 도중 울창한 소나무 숲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기암절벽 등 이곳의 빼어난 해안 절경에 심취해 활을 쏘며 즐긴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삼국통일의 정기를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지어진 절 이름도 그래서 태종사라고 한다. 한 때 신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 라고도 불렸지만 현재는 태종대라는 호칭이 보편화 되었다. 태종대에는 해안에 깎아 세운 듯한 벼랑과 기암괴석들이 가득해 약12만 년 전 제4기의 최종 간빙기에 해당하는 이곳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부산의 자연사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이다. 또 태종대는 신라 이후 가뭄이 들 때 마다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런..
2011.10.13 -
석촌동
◈ 역사 석촌동 주거지 ▷ 시대 : 신석기/백제 ▷ 지역 :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 (한강개발사업으로 없어짐) 송파구 석촌동 주거지 유적은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강개발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유적은 3개 문화층으로 형성되었는데, Ⅰ층에서는 조선자기편과 백제토기편이, Ⅱ층에서는 백제토기편이, Ⅲ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Ⅲ층에 놓여 있었는데,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가 무너져 내려 신석기시대 층위에 놓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거지는 지붕 시설만 밝혀졌으며, 하부구조는 4×3m 정도의 소형 주거지로 판단되고 있다. ※ 출처 : 자전거와 한강 홈페이지 (http://www.biker..
2011.10.12 -
양재동
◈ 역사 말죽거리 ▷ 시대 : 조선 인조 ▷ 지역 : 양재역 인근 1. 양재동 말죽거리(마죽거리)는 현 양재역 부근에 있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의 명칭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1624)에 평안병사 이괄이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반군이 질풍처럼 개성을 지나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임금은 황망히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 인조 임금은 남한강 나루에서 배를 간신히 구해 한강을 건너 신사동의 새말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말죽거리에 이르자 목이 몹시 말랐다. 그 때 이곳에 사는 유생 김이 등 6, 7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자 인조는 말 위에서 이 죽을 다 마시고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내려갔다. 그 뒤부터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에서..
2011.10.12 -
삼성동
삼성동 유래(삼성동 주민센터)삼성동은 조선시대 자연부락인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삼성리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고, 일제때 1913. 3. 1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확정때 삼성리라 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가 1963. 1. 1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자연 부락으로 닥점, 무동도, 학동도, 배곶이 마을등이 있었는데 무동도는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있던 섬으로 무동도라 한 것은 이선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한강 여러섬 가운데 유서깊은 섬으로 모래와 무성한 갈대, 울창한 수목이 가득하여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강남지구 개발에 의해 자취마저 사라지고 푸른 강물만 말없이 흐르..
2011.10.12 -
가락동
◈ 역사 ▷ 시대 : 청동기 (기원전 7세기 전후) ▷ 지역 : 송파구 가락동 송파대로 동쪽 해발 40m 가량의 낮은 구릉 위 송파구 가락동 송파대로 동쪽 해발 40m 가량의 낮은 구릉 위에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1963년 고려대학교가 1기를, 1976년 잠실지구유적조사단이 5기를 발견하였다. 1963년 발굴된 유적은 장방형의 반움집터인데, 한강변에서 약 2∼2.5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산마루에 위치하였다. 이곳은 당시 어로생활이나 수렵에는 불편한 위치이므로 주민들은 주로 밭농사나 벼농사에 의한 농업경제에 의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유적은 산마루 가까운 능선의 사면을 깎아서 만든 장방형의 반움집터로 길이는 동서 10m, 너비는 남북 7m이며, 깊이는 경사진 지면에 따라..
2011.10.12 -
도곡동
도곡동 유래 (도곡동 주민센터 홈페이지)道谷洞은 洞名의 유래는 이 마을 뒤에 매봉산이 둘러 있고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으므로 독부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道谷이라 명명하였다. 道谷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朝鮮末까지는 京畿道 廣州郡 彦州面 良才洞이었다. 日帝때인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독골, 양재리를 합쳐 良才里라 하였다. 이후 변동 없이 내려오다가 1963년 1월 1일(法律 제 1172호) 서울特別市 城東區에 편입되면서 옛 이름 독골을 되찾아 道谷洞이 되었다. 도곡동의 자연촌락명인 독구리마을은 朝鮮時代 漢陽으로 入城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전에 한양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入城하기 전에 하룻밤 묵고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주막집 서너 집이 ..
201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