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동

2011. 10. 12. 14:05서울/강남구

삼성동 유래(삼성동 주민센터)

삼성동은 조선시대 자연부락인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삼성리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고, 일제때 1913. 3. 1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확정때 삼성리라 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가 1963. 1. 1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자연 부락으로 닥점, 무동도, 학동도, 배곶이 마을등이 있었는데 무동도는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있던 섬으로 무동도라 한 것은 이선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한강 여러섬 가운데 유서깊은 섬으로 모래와 무성한 갈대, 울창한 수목이 가득하여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강남지구 개발에 의해 자취마저 사라지고 푸른 강물만 말없이 흐르고있다.



◈ 역사


삼성리산성
▷ 시대 : 백제
▷ 지역 : 봉은사 북동쪽 삼성리산성(현재 없어짐)

삼성리산성: 언주면에 있다. 북쪽은 한강에 접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뚝섬 방향을 내려다 보는 산성으로 토축(土築)이다.
이 삼성산(三成山) 토성 자리는 현재의 영동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봉은사(奉恩寺) 가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강과 인접해 있는 유일한 낮은 산에 있다. 그 후 이들 성에 관한 기록이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사기록이 남겨져 있다.
성지(城址):언주면 삼성리 봉은사 동북쪽에 있다. 연장선 170칸, 높이 약 1칸의 토루(土壘)가 산복(山腹)을 에워싸고 한강에 임하였다.

1942년에 조사된 당시의 이 간단한 기록 외에는 이 산성에 대한 다른 조사 기록은 발견되는 것이 없고, 그 후 여러 학자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남겨진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이 산은 강변도로나 기타 도로건설로 인해 파괴되고 또 주택 등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어 현재로서는 토성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이 토성이 파괴되기 전에는 단(段)을 가진 축성(築城) 형태가 명확하게 산허리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정상부에는 수많은 고려시대 기와편과 장대석(長大石)이 흩어져 있어, 한때 고려의 장원이나 작은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건조물에 대한 기록 등도 현재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산성은 한강나루를 지키는 백제시대 수비성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



저자도(무동도)
▷ 시대 : 조선


조선시대 자연부락으로 단점, 무동도(舞童島), 학당동(學堂洞), 배곶이마을 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동도는 일명 저자도(
楮子島) 또는 압도(鴨島)라고도 하였으며 이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 있던 섬으로 옛날 이곳에는 닥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저자도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그렇게 불렀다. 이 저자도는 국가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였다.
강남구 삼성동 한강 가운데 저자도가 있어 고려시대부터 명승지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이 저자도는 서울 도성 안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이 동대문 밖을 지나 마장동과 사근동의 동쪽 변두리를 스쳐 남쪽으로 흐르다가 사근동 동남쪽 모퉁이 쯤에서 양주 땅에서 흘러 내려오는 중랑천과 합류되어 다시 서남으로 꺾이면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관계로 생겨난 삼각주로서 1930년경만하더라도 동서의 길이 2천미터, 남북 885미터 되는 118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이루고 있었다. 고려때나 조선시대에는 봉긋한 등성이도 있었고 넓은 밭과 집들도 들어선 특유한 섬풍경을 이루었기땜누에 고려말의 인물인 한종유는 여기에 별장을 짓고 그 노후를 보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이 섬을 둘째 딸 정X공주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아빈세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 출처 :  마케터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



승과평
▷ 시대 : 조선 명종
▷ 지역 : 봉은사 앞 뜰

지금의 코엑스 부근의 삼성동 봉은사 앞 뜰을 <중의 벌> 또는 승과평이라고 한다. 지금부터 약 450여년 전 조선 11대 왕인 명종 때였다. 명종이 나이가 어려서 문정왕후 윤씨가 섭정을 하였다. 이 때 허응대사와 보우대사가 당시 경기도 광주군 봉은사에 있었다. 당시 임금께서는 고려조에서 시행하였던 불교의 승과제도를 두기로 하고 허응, 보우 양 대사에게 분부를 내리어 선학시험을 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온 나라안 중들은 이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모였던 중이 무려 수천명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시험장소가 좁아 그 많은 응시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지금의 봉은사 앞뜰 넓은 들판을 시험장으로 하여 시험을 보게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들판을 중의 벌 또는 승과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출처 :  마케터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

 

◈ 문화재

봉은사(奉恩寺) 선불당(選佛堂)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64호
▷ 지역 : 삼성동 73번지

유서깊은 봉은사의 대웅전 한단 아래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선불당은 대중을 위한 선방(禪房)으로, 1941년 심검당이 있던 자리에 중건된 것이다. 선불당이라는 이름은 I봉은사사적기 J를 비롯한 일체의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건 때 새로 붙여진 듯하다. 그 의미는 계율을 일러주는 곳, 혹은 선법·교법을 닦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특히 다른 전각들과 달리 독특한 구조를 가진 건물로 크게 주목 받고 있다. 보통 궁실이나 사찰을 비롯한 고건물의 크기는 칸수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인데, 선불당은 정면 8칸, 옆면 3칸의 목조기와집으로 비교적 큰 편이며, 전체적으로 거창하다는 느낌을 먼저 주게 된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내부의 실제 구조는 앞면 5칸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동서로 4칸, 남북으로 3칸 규모인 큰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2칸 방이 있고,

다시 오른쪽에 부엌과 큰방 등이 있어 결국 내부의 3면이 빙 둘러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지붕은 단층 팔작지붕의 초익공(初翼工)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서는 특히 지붕의 형태가 독특하게 꾸며져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일반적인 팔작지붕의 형태는 밖에서 볼 때 양 측면에 하나씩 전부 두 개의 합각(合閣)이 있는 것에 반해 선불당은 건물 앞면과 뒷면에도 각각 2개씩의 조그마한 합각을 꾸며 모두 6개의 합각이 보이는 것이다. 양 측면의 합각에도 원이삼점(圓伊三點)을 그렸으며, 앞뒷면의 작은 합각벽에는 가운데에 원을 그리고 다시 그 안에 ‘卍’자를 넣고 주위에도 ‘卍’자 형태로 무늬를 그려 넣었다.
기단(基壇)은 장대석(長臺石) 한 벌대 기단이고, 다듬은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 두(柱頭)를 얹고 쇠서를 내어 초익공 양식을 이루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또한 박공(朴工)의 형태도 특이한데, 작은 박공을 남북 방향으로 좌우 양 끝에 대칭으로 올려 놓았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 가옥에서는 쓰이지 않던 독특한 기법이라고 한다. 박공을 이렇게 꾸민 까닭은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지붕면이 너무 크고 길기 때문에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온돌방 2개와 붙어 있는 부엌은 기둥 옆에 용지판을 대고 그 사이에 화방벽을 설치하였다. 하부는 자연석을 시멘트 몰타르로 쌓아 올렸고, 상부는 역시 시멘트 몰타르에 얕게 줄 눈을 파고 튀어나온 부분에 칠을 하여, 마치 붉은 벽돌로 쌓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 부엌에 난 여러 문 가운데 정면 쪽에 있는 두짝 널문에는 바깥 부분에 대칭 구조로 그려진 2체의 신장상이 있다. 한 손에 칼을 잡고서 두 눈을 부릅떠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위풍당당하게 그려져 있다. 선불당 안에는 관음보살입상과 후불탱화가 있다.
단청은 건물의 외진 부분과 처마에만 베풀었다. 처마부분과 툇간 우물반자에는 모로 단청을, 도리(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석까래를 놓는 나무)와 창방(집에 모양을 내느라고 대청 위 장여 밑에 다는 넓적한 도리), 장여(도리 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의 내부 및 퇴량(退樑)에는 긋기단청을 했다. 내부로 들어가서는 불단 상부의 보개(寶蓋) 부분에서도 모로단청을 볼 수가 있다.

비록 연대가 오래지 않고 내부천장과 뒷편의 증축 등으로 다소 변형되었으나, 19세기적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목조건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90년에 선불당 실측조사를 실시했고, 이때 다음과 같은 마루도리의 묵서명이 발견되어 이 건물이 1941년 10월 8일 정오에 상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용 소화십육 불기이천구백육십팔 신사시월팔일정오 상량지후 천하태평 불일증휘 구 ◈
       (龍 昭和十六 佛紀二九六八 辛巳十月八日正午 上樑之後 天下太平 佛日增輝 龜)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



홍무 25년 장흥사 명동종(洪武二十五年 長興寺 銘銅鐘)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76호
▷ 지역 : 삼성동 73번지

대웅전 한쪽에 보면, 조선시대 범종 2구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 중 윗부분이 조금 결실되고 크기가 조금 작은 것이 장흥사 명동종. 1392년(태조 1)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60cm, 입지름 49.5cm의 아담한 크기에 전체적인 균형이 잘 잡혀 있어 맵시가 난다. 조선시대 범종이라고는 하지만,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던 해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고려시대 말기의 작풍(作風)이 뚜렷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동종은 봉은사 동종(銅鐘), 또는 봉은사 승방(僧房)에 걸려 있다 해서 일명 ‘봉은사 승방종’이라 불리기도 한다. 혹은 명문(銘文)에 따라 봉은사 ‘홍무이오년명동종(洪武二五年銘銅鐘)’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동종을 주성(鑄成)할 당시의 사찰이 장흥사(長興寺)였으므로 일반적으로 ‘장흥사 명동종’이라 불리고 있다.

명문에 의하면, 처음 봉안되었던 곳은 경기도 여주의 상두산에 있던 장흥사로, 그 고장 호장(戶長;고려·조선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로서 해당 고을의 모든 향리들이 수행하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하던 자리)을 중심으로 한 몇몇 유지들이 발원하여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를 보면, 장흥사가 철거되면서 그곳에 있던 불상, 재와(材瓦), 기물 등을 봉은사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어, 이 범종이 장흥사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때는 1705년으로 추측되나 확실치는 않다.

본래 우리나라 범종은 다른 나라의 것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맨 윗부분에는 용 한두 마리가 서리어 있으면서 그 용신이 종을 거는 꼭지, 곧 용뉴로 사용되며 그 옆에는 음통(音筒) 또는 음관이라고 불리는 막대 모양의 것이 서있게 마련이다. 그 바로 아래는 연꽃·당초 무늬 등으로 장식된 띠가 둘려지면서 정상부와 몸통 부분과의 경계를 짓는다. 몸통 상단에는 유곽(乳廓)이라는 방형 또는 사다리꼴 모양의 네모진 테두리가 있고, 그 안에 돌기 모양의 유두(乳頭)가 있다. 또 몸통 중간 부분에는 비천(飛天) 혹은 나한(羅漢) 등의 인물공양상과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어김없이 배치된다. 맨 아래에는 다시 꽃무늬로 장식된 폭이 넓은 띠가 둘려져 종신(鐘身)을 마감하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나라 종의 형태이다. 특히 유곽의 유두는 중국과 일본의 것이 종마다 그 개수가 일정하지 않고 각각인데 비해 우리나라 것은 신라시대 가장 오래된 종으로부터 현재의 종에 이르기까지 늘 9개로 그 수가 언제나 일정한 것이 큰 특징이다.

이 봉은사 동종도 대체로 한국종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아쉽게도 정상부와 용뉴와 음통(音筒) 부분이 떨어져나가, 음통이 있던 자리에는 둥근 구멍만이 남아 있으나 나머지 부분은 완전한 편이다. 몸통에는 비천 대신 두광을 갖추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연화좌 위에 서서 구름을 타고 가는 모습으로 양각되어 있다. 몸통 가운데는 수십 자의 명문이 역시 돋을새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판(天板)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어깨 부분에는 입상(立狀)의 보상화문(寶相華紋)이 장식되어 있으나 일부가 파손되었다. 상대(上帶)는 상하 0.8cm 정도의 연주문대를 두르고, 그 사이에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네 곳에 설치된 사다리꼴의 유곽도 외곽은 연주문대를 돌리고, 그 안을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연화령 유좌(乳座)에 돌출된 유두 9개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유곽 부분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곽의 두 귀퉁이 즉, 좌우연(左右緣) 하단에 술장식이 드리워져 있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범종에서 보지 못했던 특수한 의장(意匠)이라 하겠다.

종신의 하복부에는 보살과 당좌(撞座)를 교호(交互)로 4좌씩 배치하였는데 보살은 입상으로 운상계(雲上界)에서 하계(下界)를 굽어보고 있으며 원형의 두광(頭光)과 보관(寶冠)·천의(天衣) 그리고 유연한 자세 등이 고려시대 동종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당좌는 가운데 7과(顆)의 연자(蓮子)가 있는 자방(子房)이 있고 원권(圓圈) 밖으로는 단엽 17판의 연화문이 돌려져 장식되었다. 하대는 구연부(口緣部)를 따라 돌려져 있는데 상하연(上下緣)에 연주문이 장식되어 있고 그 내면에는 보상화문이 가득히 조각되어 있다. 명문(銘文)은 동체하부(胴體下部)에 다음과 같이 11행으로 음각되어 있다.

◈ 洪武貳拾伍年九月拾七日川寧土 象頭山長興寺鐘造成金三百斤以入鐘 施主戶長信善 施主大原 化主信雲 同願角瓊 願金光木 同願信哲 同願)信瓊 大匠朴 ◈

위 명문에서 홍무이십오년(洪武貳拾伍年)은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해당되므로 고려왕조 최말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