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동

2011. 10. 12. 14:43서울/강남구

◈ 역사

말죽거리
▷ 시대 : 조선 인조
▷ 지역 : 양재역 인근

1. 양재동 말죽거리(마죽거리)는 현 양재역 부근에 있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의 명칭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1624)에 평안병사 이괄이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반군이 질풍처럼 개성을 지나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임금은 황망히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 인조 임금은 남한강 나루에서 배를 간신히 구해 한강을 건너 신사동의 새말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말죽거리에 이르자 목이 몹시 말랐다. 그 때 이곳에 사는 유생 김이 등 6, 7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자 인조는 말 위에서 이 죽을 다 마시고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내려갔다. 그 뒤부터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에서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1987)

2. 1. 서울에 당도하기 하루 전 양재역까지 와 주막에 들어, 우선 타고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지시한 후 본인도 세수세족하고 저녁밥을 청하였다는 데서 유래

3. 한양에서 낙향하는 퇴관자가 전송하는 벗들과 압구정에서 마지막 주연을 베풀고 헤어진 후 저녁노을에 찾아든 첫 주막에서 이제부터 천리길을 가야 할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라고 지시하면서 본인도 여장을 풀었다는 데서 비롯

※ 출처 : 마케터 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




양재역벽서사건
▷ 시대 : 조선 명종
▷ 지역 : 양재역

조선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獄事).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라고도 불린다.

중종 말년부터 경원대군(慶源大君)의 외숙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일파와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大尹) 일파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는 한편, 윤원형의 누이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자, 소윤 세력은 역모를 씌워 대윤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로, 그 과정에서 사림(士林)계열의 인물들까지도 많이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윤 세력이 자신들에 대한 정적으로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잔존 인물들을 도태시키려고 일으킨 것이다.

1547년(명종 2) 9월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윤원형·윤인경(尹仁鏡)·이기·정순명(鄭順明)·허자(許磁) 등은 이전의 처벌이 미흡하여 화근이 살아 있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정황(鄭?)·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김만상(金彎祥)·권응정(權應挺)·권응창(權應昌)·이천계(李天啓)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이 중에는 사림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鳳城君?)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이 많았다.

1565년 소윤 일파가 몰락함으로써 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이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고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한 뒤로는 벽서사건 자체가 무고로 공인되는 한편,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신원과 포장이 여러 단계에 걸쳐 행해졌다. 이 사건은 익명으로 쓰여진 것을 문제삼았다는 절차상의 잘못이 많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 출처 : 네이버 지식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80585)


역원제도
▷ 시대 : 고려~조선
▷ 지역 : 양재

양재역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양재(良材)로 표기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광주부 서쪽 40리 떨어진 언주면에 위치하였던바, 대로에 속하였던 양재역은 문관 6품직인 찰방(察訪) 1인이 배치되었다. 양재역은 처음 과천(果川)에 속하였는데, 언제 광주부에 속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며 조선 말기에는 수원(華城) 영화도(迎華道)의 속역(屬驛)이 되었다. 1759년 당시 양재역에는 마필 27마리와 노비 27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 출처 : 강남구청 사이트 (http://tour.gangna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