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2. 13:26ㆍ서울/강남구
道谷洞은 洞名의 유래는 이 마을 뒤에 매봉산이 둘러 있고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으므로 독부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道谷이라 명명하였다.
道谷洞의 연혁을 살펴보면 朝鮮末까지는 京畿道 廣州郡 彦州面 良才洞이었다. 日帝때인 1914년
3월1일 경기도 구역 획정이 있었는데 이 때 독골, 양재리를 합쳐 良才里라 하였다.
이후 변동 없이 내려오다가 1963년 1월
1일(法律 제 1172호) 서울特別市 城東區에 편입되면서 옛 이름 독골을 되찾아 道谷洞이 되었다.
도곡동의 자연촌락명인
독구리마을은 朝鮮時代 漢陽으로 入城하는 중간에 있는 마을로 전에 한양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入城하기 전에 하룻밤 묵고 잠깐 쉬어가는 마을이었다.
주막집 서너 집이 오솔길 옆 골짜기에 있어 언제부턴가 이 마을을 독골(독구리)마을이라 불렀다. 日帝때 土地改革당시 독구리는 道谷里로 불리어지다가
이 마을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때 당시 初代洞長으로 선출된 申東明氏가 城東區廳에 道谷洞으로 신고하여 道谷洞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이 마을의
토착주민들은 독구리라 부르고 있다.
명소명 : 말죽거리
[위치]
양재동 937번지와 양재역 일대
[유래]
말죽거리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이고 한자로는 良才驛으로 기록되어 있다. 양재역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매우 이름 있는 역으로 기능을 가졌으리라 짐작된다. 양재역은 서울 도성에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로 시작되는 첫 번째 역으로서 삼남 지방으로 나가는 벼슬아치나 삼남지역에서 서울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벼슬아치들은 반드시 양재역으로 거쳐야만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물론 예전의 길은 지금처럼 넓은 길이 아니었고 아주 좁은 길이었다. 예전의 역은 서울 도성 이남으로는 양재역을 시발점으로 해서 30리마다 역이 있었고 역을 관찰하는 찰방이 있었다. 찰방은 지금의 역장 격이었다. 벼슬아치나 암행어사는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할 수 있었고 30리마다 설치된 역에서 말을 바꾸어 탈 수 있었다. 역에는 관원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먼 길을 가는 나그네일 경우에는 역 부근에 있는 주막집에서 식사하고 잠도 잘 수 있었으니 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이 되었다. 조선 명종 때에 정치적 옥사사건인 양재역 벽서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양재역에 모이는 것을 이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속설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인조 때에 남쪽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말을 탄 채로 팥죽을 들었기 때문에 말죽거리로 불렸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말죽거리는 서울 도성을 나와서 삼남으로 출발하는 지점이 있었고 삼남에서 서울 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말죽거리가 마지막 주막이었다. 삼남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신도 복장을 단정히 정리하고 식사도 충분히 하고 말죽도 충분히 먹였을 것이고 서울 도성으로 입성하는 사람도 복장을 단정히 정리하고 먼 길을 온 말에게도 말죽을 충분히 먹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어느 역보다도 말죽을 많이 먹여야 하는 거리였으므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어졌을 것으로 본다.
명소명 : 싸리고개
[위치]
강남구 도곡동 937번지 일대
[유래]
말죽거리와 사평나루 사이에 위치한 고개로서 조선시대에는 수십 년 된 싸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하여 싸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고갯마루에는 이곳을 왕래하던 사람들의 여행길의 안녕을 빌던 성황당이 있었으며, 고개에 오르면 서울 남산이 보인다고 해서 서울고개라고도 하였다. 싸리고개를 흔히 박석고개라고 불렀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고개가 없어졌지만 1960년대 말엽까지만 해도 고개가 있었다. 고개라는 말은 언덕 즉 비탈진 곳을 이르는 말이다.
싸리고개에는 오래된 굵은 싸리나무들이 숲을 이루었고 그 언덕(고개)을 지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시켜달라는 뜻으로 돌을 던지기도 하고 형형색색으로 된 천(옷감)을 싸리나무에 매어 달기도 하였다. 고개에 돌을 던지는 것은 신에게 돌이라도 바친다는 정성을 뜻하는 것이고 형형색색의 옷감을 바치는 일은 더욱 큰 정성을 바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색깔이 든 옷이나 옷감이 흔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색깔이 든 옷감은 매우 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물도 들이지 않은 흰 무명옷으로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의민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싸리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은 삼남으로 가는 사람이나 서울 도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고개를 지나면서 자신의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명소명 : 역말도당제
[위치]
강남구 도곡동 산 177번지
[유래]
원래 강남구 역삼동 797번지에 당집과 신나무(상수리)가 있어 도당제를 지내왔으나 1965년 강남개발로 없어짐에 따라 구능대감제를 지내던 현 위치 느티나무로 이전하여 도당제를 지내고 있다. 도당제는 마을 주민의 안녕과 풍농을 지켜준다고 믿던 마을 수호신에 대한 동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제사 관행으로 일대에 거주하는 농민들의 공동체적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매년 9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역말향우회가 주관하여 마을 사람 가운데 부정이 없는 사람을 제관으로 삼아 제사를 주관케 하는 관습이 이어져 오고 있다.
- 느티나무 : 시지정보호수 1-24 (크기는 둘레 7.9m, 높이 27m)
명소명 : 독구리 산제당
[위치]
강남구 도곡동 산 34번지 매봉산 일대
도곡동 산제당은 언제 처음 지은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전부터 산제당이 존재하여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500여 년 전부터 산제당은 존재하여 왔으리라 짐작된다. 매년 음력10월 초순에 택일하여 토착민들이 중심이 되어 서로 정성을 모아 제수를 마련하여 산제를 올리고 있다. 지금부터 약 60여 년 전에 산제당을 지금의 위치에 왼편으로 약100m 지점으로 옮긴 적이 있는데 그 해에는 나쁜 전염병이 돌고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산신령님께서 노하셔서 그 같은 재앙이 든 것으로 알아 즉시 산제당을 지금의 위치로 원상복구하자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산제당 앞을 지날 때면 산신령님께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또 소원을 빌기도 한다.
명소명 : 孝子 金義信의 碑
[위치]
강남구 도곡동 산 177번지
이 마을에는 지금부터 약45년전 김의신이라는 효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뒷산 느티나무 밑에서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꿈에 백발노인으로 변장한 산신령이 나타나서 일러주기를 『너희 아비 병이 낳으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으니 할 수 있겠느냐?』하고 물었다. 이 때 김의신은 『산신령님 꼭 하겠으니 일러만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했다. 산신령은 『사람의 허벅지살을 고아서 드리면 쾌유하게 될 것이니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린 의신은 자신의 허벅지살을 떼어 고아서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병이 완쾌된 후 天壽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의신은 아버지 묘 앞에서 3년 동안을 움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슬퍼하니 마을 사람들이 이곳 산 21번지에 孝子碑를 세웠다.
- 이 비는 현재 역마을 사람들이 洞神으로 받드는 느티나무(수령 700년)앞에 있음
명소명 : 청동기시대의 수혈 주거지
[위치]
강남구 도곡동 산 31-1번지
BC7세기~4세기경 청동기인 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주거지의 크기는 실내가 약 12평의 넓이로서 직사각형의 견혈식(堅穴式:세로로 파여진)이다. 유물로는 무문토기 9점, 돌도끼 3점, 반월형 돌칼, 단도마연토기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유물은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대 : 청동기 기원전 7~4세기
▷ 지역 : 역삼동 산21-1(현 도곡동) 양재천변 표고 90m 구릉 위
역삼동 청동기유적은 한강 유역에 벼농사가 시작된 뒤의 전형적인 주거지이다. 화재로 인하여 유물이 원위치에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 조사되어 당시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한강 지류의 하나인 양재천변 강남구 도곡동의 표고 90m 구릉 위에 위치한 무문토기시대의 거주지로 1966년 숭실대학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일대는 표고 100m 내외의 매봉 야산 줄기가 이리저리 뻗은 준평원으로 유적지에서 전방 약 10km에는 표고 544m의 청계산이, 동남방으로는 표고 283m의 구룡산이, 서쪽으로는 표고 290m의 우면산이 바라보이며, 북쪽으로는 3km 거리에 한강 넘어 남산과 북한산 줄기가 바라보인다. 유적이 위치한 구릉은 청계산과 우면산 사이를 흘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양재천을 끼고 있다.
이 주거지는 길이 16m, 너비 3m, 깊이 50∼60cm 크기의 장방형 수혈식 주거지이다. 또 수혈 벽을 따라서 직경 10∼15cm, 깊이 10cm 내외의 기둥구멍이 1∼2m 간격으로 나 있었으며 그 중에는 참나무 기둥이 불탄 채 숯기둥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혈 중간 부분에서는 기둥구멍이 찾아지지 않으며, 또 화덕자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주지의 실내면적은 약 12평(약 48㎡)으로 현대의 15∼16평 가옥에 해당되어,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2∼3세대의 연립형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생활도구의 양으로 보아도 15∼16명의 가족이 생활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 유물은 석기로 석부 3점, 석촉 3점, 반월형 석도 1점 등 20여점과 토기로 복원이 가능한 심발형 공렬무문토기와 호형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중 반월형 석도는 청동기시대 농경문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다. 토기는 이 유적을 대표하는 무문토기와 붉은간토기(紅陶)가 발굴되었는데 복원된 기형을 보면 옹형(甕形)과 호형(壺形)의 두 형태이다.
역삼동 주거지의 연대는 기원전 6∼7세기로 추정된다. 가락동 주거지보다는 약간 후대에 속하며, 명일동·수석리·아차산 주거지보다는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일반적인 무문토기인의 주거지가 지름 6∼7m 규모의 원형 또는 방형 수혈주거지였다. 그런데 그 규모가 큰 역삼동 주거지는 핵가족 단위로 주거생활을 하던 씨족공동체사회가 사회분화가 일어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출현하는 과도기적 주거공간으로 출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의 경제생활은 농경이었으며, 양재천의 어로와 인근 야산의 수렵도 가능하였다고 판단된다.
※ 출처
- 자전거와 한강 홈페이지 (http://www.bikeriver.co.kr/story/h_cluture01.htm)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
◈ 전설
매봉산 묘터
▷ 시대 : 미상
▷ 지역 : 역마을과 독구리마을 사이 표고 300미터의 매봉산
강남구 도곡동에는 역마을과 독구리마을 사이에 표고 약 300미터 정도의 매봉산이 있는데 이 산의 묘터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독구리 마을 측의 산지세는 묘터자리가 좋아 누구든 탐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옛날 이 산은 장씨의 사산(私山)이었다. 그런데 장씨와 이씨가 사돈을 맺었는데 어느날 이씨가 사돈인 장씨에게 묘터를 쓰기 위해서이니 산을 좀 빌려달라고 하여 장씨는 쉽게 매봉산을 묘터 자리로 빌려주였다. 그 뒤 몇대를지나 묘터로 빌려준 매봉산 일부를 장씨가 되돌려 달라고 이씨에게 요구하였다. 이씨는 선대 때 얻은 묘터이기 때문에 돌렺루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때 독구리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김씨 성을 가진 한 노인이 매봉산 묘터 문제의 자초지종을 김판서에게 말하였다. 김판서는 광주고을 원에게 서찰을 보냈으며 이 서찰을 본 고을 원은 이 묘터가 있는 산은 이씨의 소유여야 한다고 판결하여 현재 한 쪽은 이씨의 소유가 되고 있다. (김백석, 56세, 도착, 도곡동)
※ 출처 : 마케팅 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
효자 김의신
▷ 시대 : 1940년대경으로 추정
▷ 지역 : 도곡동 산 21번지
도곡동에는 1940년대에 김의신이라는 효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웃어른을 극진히 공경하여 인근 마을까지도 효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김의신이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그의 엄친인 김창순이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뒷산 느티나무 밑에서 아버지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백일 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꿈속에 백발 노인으로 변장한 산신이 나타나서 일러주기를 "너의 아버지 병이 나으려면 한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으니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이 때 김의신은 "산신령님 꼭 하곘으니 일러만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했다. 산신령은 "사람의 허벅지살을 고아서 드리면 쾌유하게 될 것이니라"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린 의신은 자기의 허벅지 살을 떼어 고아서 드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병이 완쾌된 뒤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시자 아버지 묘 앞에서 3년 동안 움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슬퍼하니 유지들이 이곳 산 21번지에 효자비를 세웠다. 이 비는 현재 역마을 사람들이 동신으로 받드는 느티나무 앞에 있으며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는데 집안이 번창한다고 한다.
※ 출처 : 마케팅 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