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6. 15:58ㆍ강원도/고성군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
신라 혜공왕(서기 769년)때 창건된 사찰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는, 창건 이후 5차례의 화재로 설법전 1동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1991년 제17회 세계잼버리 이 후 널리 알려지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수바위가 눈앞에 보이고, 신선봉과 잼버리장, 설악산 울산바위, 콘도미니엄 등이 주변에 밀집되어 있어 돌아볼 곳이 많다. 또한, 사찰내에 전통찻집이 있어 조용한 산사에서 전통차를 즐기는 것도 좋은 듯 하다.
전통사찰 제27호. 설법전 1동 문화재자료 제114호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는 것은 화암사가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닿고 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보면 화암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화암사의 기록을 전하는 사적기에도 화암사는 어김없이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화암사는 우리민족의 통일기도 도량이다.
화암사가 창건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2백여년 전인 769년(신라 혜공왕 5),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서 이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금강산 화암사' 라는 명칭도 이 창건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명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때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이때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華嚴寺)라는 절 이름이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때는 1912년 3월 1일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이다.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화암사란 명칭을 공식으로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절 이름이 화암사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된 전설도 전해진다.
화암사 남쪽 3백미터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모양의 바위는 모양이 워낙 빼어나 빼어날 수(秀)자를 써서 수암(秀巖)이라 불린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이 이 바위 위에서 좌선수도 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스님, 신도들이 찾는 기도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이 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객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 욕심을 내어 쌀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없이 흔드는 바람에 쌀보시는 끊어졌다. 화암사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게 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한다는 이야기이다. 수바위는 아들을 점지 해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혼부부들의 중요한 참배 처이기도 하다.
화암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여러번 중창을 거듭하였다. 특히 1794년(정조 18년)에 이루어진 중창은 화암사의 사격을 증명해 주는 큰 불사였다. 이 불사는 도한스님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한 스님은 이때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3 . 7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임금은 제조 상궁 최씨를 이절에 파견하여 도한 스님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스님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암사를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를 크게 지어주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병풍 8폭 등을 하사하고 사방금표를 정해 주었다. 이처럼 화암사는 한때 왕의 원당으로 지정될 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거듭된 화마와 수마, 그리고 6.25 동란으로 사찰은 파손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90년대 들어서 오늘날의 규모로 중창이 되었다. 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인법당,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선원, 비림(부도군) 등을 두루 갖추어 대찰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신평벌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큰 일주문 옆에는 춘담대법사탑을 비롯, 화곡, 영담, 원봉, 청암스님 등의 부도 15기가 모셔져 있고 한참을 걸어 닿은 금강교는 세개의 홍예가 떠받히며 수려한 화암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출처 : 강원도 고성군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