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6. 14:30ㆍ경상북도/영주시
지난 금요일(10/13) 회사에서 단체로 워크샵을 갔습니다. 창립기념일 겸해서 갔었는데 역시 우리나라 가을은 명품입니다.
하늘 색 한번 봐보세요. 너~ 무 예쁩니다.
소수서원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중 입니다.
입구 소나무 숲이 시원해 보입니다. 이 소나무들이 그 귀하고 비싸기로 유명한 적송이라네요.
문화 해설사를 만나고 처음 본 것이 이 당간지주 입니다.
소수서원이 생기기 전, 이 자리에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찰에서 깃발을 올리기 위해 사용했던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것이라네요.
영주에는 당간지주가 3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개가 이것이랍니다. 또 하나는 뒤에 보게될 부석사에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중종 36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유학자 안향을 모시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했다가 유생교육을 위해 백운동 서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주세붕이란 군수가 나중에도 나오겠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세붕 이후 풍기군수로 그 유명한 퇴계 이황이 부임해 오고 임금님께 많은 사람들이 공부할 수있도록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국가에서 이를 허가해 주고 이름도 소수서원이라고 사액을 내려주었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말 그대로 수학(修學) 즉, 공부하는 것이 끊어지지 않고 잘 이어지라고(紹 : 이을 소) 지어준 이름이랍니다.
위에 사진에서 보면 잘 안보이지만 바위에 붉은 색으로 공경할 경(敬)자를 새겨넣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유행이었답니다.
그래서 주세붕이 바위에 유학자들을 위한 지침으로 경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경자는 붉은 색이 아니라 글씨만 파 놓았다고 합니다. 붉은 색으로 쓰여진 것은 슬픈 사연이 있는데...
서원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는데 유생들이 밤마다 슬피 우는 소리때문에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도저히 공부가 되지 않아 주세붕 군수에게 이야기를 하였고, 군수가 이리저리 알아보니....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반대를 하던 동생이 이곳으로 귀향을 왔었다고 합니다. 단종은 소백산맥을 넘으면 있는 영월에 유배를 왔었구요. 단종 복위를 위하여 세조의 동생이 봉기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노비의 고발로 들통이 나 버리고, 역모의 죄값으로 일명 정축지변이라는 대 참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사람들을 죽이고 이 곳에 수장을 시켰는데 그 핏물이 7km 정도 떨어진 동촌리 까지 흘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촌리를 핏물이 끝난 마을이라고 해서 지금까지도 피끝마을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주세붕 군수가 그 넋들을 위로해 주고 敬자에다가 귀신을 제어한다는 붉은 색 칠을 했고 그 이후로는 우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보면 참 맑은 물인데 그 당시때에는 온통 핏물이었겠거니 생각을 해보면 참 끔찍합니다.
그리고 敬자 위로 흰 글씨고 백운동이라고 써 있는데 이것은 이황이 적었다고 합니다. 원래 백운동이었는데 소수서원으로 바뀐 것이어서 백운동이 잊혀지지 말라고 적어놓았답니다.
이 물줄기는 서원을 쭉~ 감싸고 흘러나간답니다.
사실 소수서원에서 문화해설사분께서 너무 이야기를 재밌게 해 주셔서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아쉽게도... ㅎㅎ
물이 보이는 곳 뒷쪽으로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곳에는 편액이 2개가 걸려 있습니다.
하나는 밖에, 하나는 안쪽에.
안쪽에 있는 현판은 이황선생의 제자가 쓴 편액인데 당시 조선에서 가장 명필이라고 합니다.
이황선생이 자기 제자에게 현판 글씨를 쓰라고 시켰는데 그 제자가 긴장을 하여서인지 글씨를 엉망으로 썼다고 합니다.
이황선생이 화가나서 질책을 하고, 그 제자는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없는 자리에서 다시 그 현판을 썼는데 초서체로 그야말로 멋진 글씨로 썼습니다.
특히 마지막 겸정령의 마지막 정(亭)자는 마지막 획을 힘있게 올려쳐서 마치 용이 승천하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찍은 사진이 없는데, 포털에서 검색하시면 나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그 글씨를 보고 그 글씨의 획이 살아있기때문에 이곳에서 좋은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며 그 획의 일부를 짤라버립니다.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현판은 그 획이 짤린 글씨만 볼 수 있습니다.
(사진이 없이 말만 쓰니깐 좀 그렇네요 ㅠㅠ)
정자 앞쪽으로는 조그만 봉분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안향선생께 제사를 드리기 전, 제물에 흠이 있는지 조사를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9명이 쭉 둘러서서 흠결을 파악했다고 하니 지극 정성이었지요.
여기까지가 소수서원 밖입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ㅎ)
소수서원에 들어가면 백운동이라는 강의실이 보입니다. 이 안의 모든 건물들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있어서 뭐든지 유교식 배려가 많이 되어 있었습니다.
백운동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3면이 다 뚤려 있다는 것입니다.여름에 시원하게 공부하라는 뜻이라더군요. 그리고 툇마루가 4면에 쭉 둘러서 있습니다. 스승님께 등을 보이면 안되기때문에 뒷걸음쳐서 나가야 하고 나가다가 넘어져도 땅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4면으로 다 쳤다네요.
백운동 서쪽으로는 안향의 사당인 문성공묘가 있습니다. 문성공이 안향이고 묘라는 글자는 일반인들에게는 쓰지 않지만 위대한 유학자라서 국가에서 묘라고 쓰도록 해 주었답니다.
그리고 서쪽에 있는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은 동쪽이 좋고 죽은 사람들은 서쪽이 좋다고 해서랍니다.
오늘날까지도 1년에 2차례인가 제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제사때에는 날것 상태로 제사를 드리고 제사 후 익혀서 음복합니다. 물론 제사때는 남성만 참여하구요.
그 뒷쪽으로는 일종의 교무실인 직방제가 있습니다. 그 뒤로는 동쪽에는 기숙사인 학구제와 지락제가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되기 때문에 약간의 거리가 있고, 높이도 직방제가 더 높이 있습니다.
그리고 굴뚝이 다른 건물들과 달리 직방제와 학구제/지락제는 땅으로 나 있습니다.
이렇게 생기면 불을 아무리 때도 방이 뜨겁게 달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우면 공부 안하고 잘까봐 얼지 않을 정도로만 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기숙사가 조그만 형태로 2개만 있는 이유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이 필요한 수업만 와서 듣는 형태였기 때문에 많은 방이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옆쪽으로는 도서관인 장서각이 있습니다. 그 당시 3천권이 넘는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일제시대때인가 다 빼앗겼다고 하지만요.
그 당시 책 1권이 평민 1년 연봉(?)만큼 하던 때이니 얼마나 귀한 곳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황선생과 관련해서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조선시대는 반상의 구분이 엄격하던 때라서 양반이 아니고는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대장장이가 몰래 수업시간을 엿듣는것을 본 이황선생이 그 대장장이를 꾸짖다가 그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것을 알고는 그를 테스트 하게 됩니다.
막상 테스트를 해 보니 지금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보다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감명받은 이황선생이 그 대장장이로 하여금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대장장이가 이황선생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만들었다고 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동상은 정확한 기억이 아님 ㅋ)
소수서원을 나오면 박물관이 나옵니다.
이 박물관에서 재밌었던 것은 앞부분에 나왔던 주세붕 군수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당시에 그 지역에 특산물로 산삼을 진상해야 해서 많은 주민들이 산삼을 캐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로 인한 폐해도 많았구요. 이에 주세붕 풍기 군수가 산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연구 및 지원을 했고 그 재배를 성공시켜 오늘날 유명한 풍기인삼이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쪽지역은 인삼과 인견이 유명하죠.
박물관을 보고 나오면 민속촌처럼 전통 마을이 꾸며져 있고 이 구경도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