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동
2011. 10. 12. 17:22ㆍ서울/강남구
수서동 유래 (수서동 주민센터)
수서동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이라고 불리었다.
그것이 이 마을에 조선 태조의 제7자 무안대군 방번 내외와 그 봉사손 광평대군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수서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수서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으며, 1914년 3월 1일 경기도 구역 확정 때에도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로 남아 있었다. 1992년 10월 1일 일원동에서 수서동이 분동 되었다.
수서동에는 탄천에 접한 지역 쪽으로 남부순환도로가 올림픽공원까지 이어지고 있고, 자곡동·율현동·세곡동을 지나 성남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서로 교차하는 수서동 인터체인지가 있어서 중요한 교통 시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광평대군묘역 일원(廣平大君墓域 一圓)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8호 (1981.02.05 지정)
▷ 지역 : 수서동 산 10-1 소재
이 묘역 일원은 현재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궁말 혹은 궁촌이라 불렸던 수서동 대모산(大母山)에 자리잡고 있다.
총면적 125,237평의 산에 광평대군 내외의 묘소를 비롯한 그 종문 700여기의 묘소가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고, 종가재실의 고옥도 함께 있는 공동묘역이다.
광평대군 장의공(章懿公) 이 여(李璵)는 1425년(세종 7년)에 태어나서 1432년에 광평대군으로 봉하여졌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1444년(세종 26년)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광평대군의 묘소는 본래 지금의 삼성동 선릉 부근인 광주 학당현(學堂峴)에 있었으나, 이곳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게 되자 연산군(燕山君) 원년인 1495년 3월 이곳 묘역으로 이장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버지 세종(世宗)이 생존했을 당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 규모나 규범이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묘역에는 광평대군, 무안대군, 영순군(永順君), 혜정공(惠定公), 이현응(李顯應), 이 회(李廻)의 신도비(神道碑)를 비롯하여 혼유석, 석등, 석인상 등이 규례대로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훨씬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중종에서 선조시대의 인물인 손암(巽庵) 심의겸(沈義謙)이 비문을 찬하였고 두전(頭篆)은 박염(朴簾)의 솜씨이다. 특히, 1695년에 조사한 분묘의 소재와 위치를 기록해 건립한 세장기비(世葬紀碑)는 가족묘에 대한 특유한 기록을 담고 있는 비석으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곳에는 광평대군의 사당(祠堂)이 있어, 광평대군과 그 부인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을 비롯하여 무안대군(撫安大君) 내외와 영순군(永順君) 보(溥) 내외 등 3세대의 제사를 함께 받들었다. 이 사당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다. 사당은 지금의 성북구 안암동 궁말이란 마을에 있던 광평대군의 집에 따로 세운 사당인 사우(祠宇)를 지어 제사하던 것을 1911년 10월에 현재의 위치인 무안대군 묘 아래로 옮긴 것이다.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