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

2011. 10. 12. 16:21서울/강남구

신사동 유래(신사동 주민센터)


신사동 동명의 유래는 한강변에 있던 이 지역 부락 새말과 사평리의 이름에서 각각 따와 신사리라 한데서 연유한다.

신사동은 조선시대 말기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촌, 사평리 등으로 불리던 지역으로 일제 때인 1914 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경기도구역 확정때 새말, 동산말, 사평을 병합하여 신사리라 하 였다.

그 뒤 1963년 1월 1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성동구 언주 출장소 관활이 되었고 1970년 5월 18일 사평동이 신 사동으로 개정되어 1970년 7월 1일 성동구 영동출장소 관할로 되었다가 1975년 10일 1일 강남구가 신설되 어 강남구 관할이 되었으며 1977년 8월 1일 논현동이 분동되고 1980년 7월 1일 압구정동이 분동되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 역사

공민왕과 사평원
▷ 시대 : 고려후기 공민왕 10년(1361)
▷ 지역 : 신사동 강변 언덕

공민왕 10년(1361)에 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왕족과 대신을 거느리고 임진(臨津)나루를 건너고 한양을 지나 사평원(沙平原) 즉, 지금의 신사동 강변 언덕에서 눈물로 북쪽을 바라보며 언제 다시 이 나루를 건널 것인가 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 사평원의 모습을 읊은 이규보(李奎報)의 시가 있다.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르리라
왕래하는 말들 길에 차 처음에 시끄러움을 싫어했더니
한 마리 학이 숲에서 울매 미소로 그윽함을 사랑하였네
만 길이나 나는 다리(飛橋)는 무지개가 꼬리를 둘렀고
천 척 늘어선 배는 얼새머리를 나란히 하였네
고인이 보이지 아니하니 슬픔이 더하다
떨어지는 해 아득한데 누에 기대지 마소

강 어구에 돛을 내리고 머뭇거리기 한참
맑은 물에 비춰보며 가만히 수염을 세어 보네
풀이 언덕가에 어울려서 겨우 학이 숨을 만하고
밀물이 강가에 옴에 오리를 영접하듯 하네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룻 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으니
한 쌍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서 졸고 있네


-신증동국여지승람-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



사평원(역원제도)
▷ 시대 : 조선
▷ 지역 : 사평나루

공무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각 요로(要路)에 원(院)이 설치되었다. 원은 대개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원이 언제부터 설치되고 운영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1,310개소의 원이 설치·운영되었는데, 강남에는 양재역과 함께 사평나루에 있던 사평원을 들 수 있다. 원의 경영책임자는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와 향리, 관리로서 대로는 5호,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하였다. 이들에게는 잡역이 면제되고 운영경비로 원주전(院主田)이 차등 있게 지급되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공무 여행자뿐 아니라 때로는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과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교통사정이 원활하지 못했던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거나 굶고 병든 사람을 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관리가 철저하지 못해 폐지되기 일쑤여서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각 역이나 민간에 일임하는 일이 많았다.

강은 삼남지방으로 이어지는 대로가 나있고 한강 조운로(漕運路)가 통하는 지역으로 강북의 한강진(漢江津)과 이어지는 강남의 사평도(沙平渡)에 원(院)이 설치되어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또한 광주부 서쪽 35리 지점 언주면에는 신원점이 있어 남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판교(板橋)와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가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광주부 서남 25리 지점 대왕면에는 율현점이 있어 역시 남으로 20리 거리에서 판교와 이어지고, 동남으로 15리 거리에 추령(秋嶺)이 위치하였는데. 이는 용인(龍仁)에 이르는 통로가 되는 한편 북쪽으로 15리 거리에 있는 삼전도(三田渡)를 건너 서울에 입성할 수 있는 길이었다.

※ 출처 : 강남구청 홈페이지 (http://tour.gangnam.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