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연안김씨 열녀각
2012. 1. 6. 15:47ㆍ강원도/고성군
설악봉이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국사봉이 솟아있고 바로 그 아래로는 요지호가 동해로 흘러가며 용촌천을 만들어 농토에 젖줄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깊고 푸른 동해바다가 있어 수십년 전에는 이 마을을 용포동이라 이름하였고 뒤편으로는 잔잔한 언덕 같은 성황산이 성곽처럼 마을을 둘러싸 평화를 지켜주는 듯 하였다. 조선조 고종 때 노병곤이라는 분이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나이 어린 아내를 맞아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니 집안은 온통 날마다 먹구름이 덮힌 듯 근심과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내 연안김씨는 가문 높은 양가집 딸로서 나이는 어렸지만 남편의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남편을 보살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가면서 회생되기를 바랐지만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의 나이 18세요. 부인 연안김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신 남편의 혼을 모시고 수절하여 살아 오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노병서의 장남 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잇게 하였다. 부인은 양자인 재용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시키고 동경까지 유학을 보내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맹렬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시부모에게는 효부였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이런 연유로 예조 학사원에서 내리는 효부 표창을 받았고 양자인 재용에게는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현모이기도 하였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어 죽은 남편의 혼을 모시고 평생을 일편단심 사모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오다 1952년 그 생을 마쳤다.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김씨의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구에 연안김씨 열녀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생존 때 업적을 새겨 영구보존케 하여 그들 후대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시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10세 내외의 조혼으로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엄격한 법도에 눌려 평생을 집 문앞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기에 으레 따르는 시집살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내외 법이 엄격했던 그 시절의 폐쇄사회에서 얼마나 기막힌 이성으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을까.
오직 인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출처 : 강원도 고성군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