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동

2011. 10. 12. 16:00서울/강남구

역삼동 유래 (역삼1동 주민센터)

역삼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윗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 세마을을 합치 역 삼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7년 도곡동사무소에서 역삼동사무소가 분동 신설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역삼동이 역삼1동과 역삼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른다.

웃방아다리라는 이름은 죽 방아다리의 웃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마을 이었다. 아들 마을은 뛰엄뛰엄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5~10여호 정도가 한 부락을 형성하였다고 한 다.

아랫방아다리는 방아다리 아랫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 하며, 역삼동 산21의 1에서는 1996년 숭실대 사학과 유물 발굴단에 의항 선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 되었는데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은 길이 16cm 폭 3m 정도 크기의 장방형의 견혈식 주거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의 실내 면적은 12평 정도로서 당시 일반 생활인의 가옥으로서는 상당히 큰 집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기원전 7~4세기 사이의 주거지로 보고 있다.

(역삼2동 주민센터)

서울 강남구 역삼동은 본래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땅이고, 그 이전에는 과천현에 속했다고 한다. 역삼동 일대는 조선조 때 양재도찰방(良才道擦訪)이 있었던 곳으로 역촌, 말죽거리 등의 역말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역촌의 세 마을을 합해서 역삼리라 불렸다.

역삼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이었던 말죽거리, 상방하교 (윗방아다리), 하방하교(아랫방아다리) 등 세마을을 합쳐 역삼리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죽거리는 일명 역마을로서 양재역과 그 부근 마을인데 현재는 양재동에 속해 있다. 또한 말죽거리에서 얼마떨어지지 않은 곳에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마을을 작은 말죽거리라고도 불렀으며 역말 서쪽의 고개는 박석고개라 하였다 한다.

하방하교는 아랫방아다리라고도 하는데 즉 방아다리 아랫마을로 현 833번지 일대 역삼초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이었다. 상방하교는 윗방아다리라고도 불렀는데 방아다리 윗마을로서 현 테헤란로 부근 국기원 근처 마을이었다.

양재역에는 종6품 찰방이 있어 그 밑에 12개의 작은 역을 두고 관원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 하였던 곳이다.이 일대는 이괄의 난을 당한 인조임금이 피난길에 황급히 지난 곳이며 조선왕조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양재역 벽서(壁書)>사건 즉 1547년에 일어난 정미사화(丁未士禍)의 발단이 된 곳이기도 하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침범하자 인조는 황급히 한양을 빠져 나와 남도지방으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허기와 갈증에 지친 임금 일행이 이곳에 이르자 유생 몇 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니 임금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말 위에서 죽을 마시고 부랴부랴 과천으로 향했다. 해서 이 곳을 세인들은 말죽거리 <馬粥巨里>라 부르게 되었다니 이 지명이름만 들어도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하다.(혹자는 말먹이인 말죽을 먹이는 곳이라고도 한다.) 1547년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정권을 잡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폐단도 많았는데 이곳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여자 임금이 위에 있고 간신이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랴"는 글씨가 발견된 것이다. 대노한 대비는 여러 선비를 잡아 죽이고 유희춘, 이언적 등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보내는 등 소위 정미사화를 일으켰으며 이것을 <양재역 벽서사옥>이라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서울근교의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논농사 보다 밭농사를 주로 하였으며 특히 도라지 산지로 유명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옛부터 상부상조의 협동정신이 강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효자, 열녀가 많았다고 하며, 역삼동 산21의 1에서는 1966년 숭실대 사학과 유물발굴단에 의하여 선사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을 사용한 사람들은 길이 16m, 폭3m정도 크기의 장방형의 수혈식 거주지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전설


역마을 묘터
▷ 시대 : 미상
▷ 지역 : 도곡동으로 추정

옛날에 임금이 역삼동 즉, 역마을에 묘터를 잡아놓은 곳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임금의 자인이 갑자기 돌아가자 어쩔 수없이 임금이 잡아 노은 이 곳에 묘를 쓰려고 하였다 .이때 역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묘를 쓰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칠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횡액이 닥친다는 말을 믿어 제각기 몽둥이를 깎아들고 상여가 한강을 건너오기만 하면 때려부순다는 각오를 하고 한남동 나루터에 나가서 지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상주는 황급히 임금에게 나아가서 지금 역마을 사람들이 그 곳에 묘를 쓰면 상여를 부수겠다고 하면서 한남동 나루터에서 몽둥이를 들고 있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은 화가 치밀어 드디어 군대에 명하여 배를 타고 상여와 함께 한강을 건너게 하였다.
무장을 한 군인들이 상여와 함께 나루터네 도착하자 역마을 사람들은 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장 군인들에게 압도되었던 것이다. 이때 군인들이 역마을 사람들 가까이 가서 "너희들 여기 뭐하러 왔느냐?" 하고 다그쳐 물었다. 이때 역마을 사람들이 "상여 모시러 왔습니다." 하고는 몽둥이를 슬며시 버리고 힘없이 상여 뒤를 따랐다. 역마을에 묘를 쓴 다음 임금은 역마을 사람들은 돼먹지 않았으니 그놈들을 잡아 모저리 처치하라 하고 명령하였다. 이 때 상주 삼형제가 "역마을 사람들을 죽이면 돌아가신 아버님이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오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빌었다. 임금님은 상주의 간곡한 말을 듣고 "그 마을을 없애고 마을 사람들을 50리 밖으로 내쫓아라" 하여 임금님의 명에 따라 역마을 사람들은 50리 밖으로 내쫓기고 그 뒤부터 마을은 없어졌다가 이 곳에 다시 마을이 생긴 것은 30년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신동명, 67세 토착 도곡동 82-2, 초대 동장, 1987년 6월 증언)

※ 출처 : 마케팅 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