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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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 전설 대치동 은행나무 ▷ 시대 : 미상(약 500년 전) ▷ 지역 : 대치동 975-8번지 대치동 975-8번지에 소령 약 5백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앞에 영산단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나무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한 할머니가 용문산으로 정성을 드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은행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와서 이 자리에 꽂은 것이 현재에 이른다고 전해온다. 옛날 이 구마을 사람들은 지팡이가 움이 트고 자라나자 신기하게 여겨 매년 7월에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뒤부터 모두 건강하고 불구자가 태어나지 않아 동신으로 수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 출처 : 마케팅 배씨 블로그 (http://blog.naver.com/sako71?Redirect=Log&logNo=130095844126) ◈..
2011.10.12 -
세곡동
세곡동 동유래(세곡동 주민센터)세곡동 동명은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옛날의 자연부락 명칭인 의 자와 의 자를 각각 따서 제정한 것이다 세곡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이 곳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세천리, 은곡동 지역으로서 1914년 3월 1일 이 곳을 광주군 대왕면 세곡리로 칭하게 되었다. 세곡동의 행정동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1962년 말끼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관할 아래 있던 이 지역은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성동구 출장파출소의 관할하에 들게 되었다. 이 때 세곡동의 행정은 세곡동사무서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1970년 5월 18일에는 서울특별시 조례 제 163조로 세곡동사무소가 세곡동과 함께 인근 율현동, 자곡동의 행정 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2011.10.12 -
석촌동
◈ 역사 석촌동 주거지 ▷ 시대 : 신석기/백제 ▷ 지역 :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 (한강개발사업으로 없어짐) 송파구 석촌동 주거지 유적은 잠실대교 건너편 한강 연안 충적 모래층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한강개발사업으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유적은 3개 문화층으로 형성되었는데, Ⅰ층에서는 조선자기편과 백제토기편이, Ⅱ층에서는 백제토기편이, Ⅲ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Ⅲ층에 놓여 있었는데, 초기 철기시대 주거지가 무너져 내려 신석기시대 층위에 놓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주거지는 지붕 시설만 밝혀졌으며, 하부구조는 4×3m 정도의 소형 주거지로 판단되고 있다. ※ 출처 : 자전거와 한강 홈페이지 (http://www.biker..
2011.10.12 -
명일동
◈ 역사 명일동 유적 ▷ 시대 : 청동기 후기 ▷ 지역 :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 사면에 위치 강동구 명일동 유적은 청동기 후기의 주거지로 1961년 암사동 남쪽 해발 42m의 야산 사면에 위치하였다. 한 모서리가 6m 정도의 방형에 가까운 평면의 유적이며, 출토된 유물로서는 돌칼·돌화살촉·평저민무늬토기·숫돌이 있다. 돌칼은 홈이 있는 형식으로 기원전 3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된다. ※ 출처 : 자전거와 한강 홈페이지 (http://www.bikeriver.co.kr/story/h_cluture01.htm)
2011.10.12 -
양재동
◈ 역사 말죽거리 ▷ 시대 : 조선 인조 ▷ 지역 : 양재역 인근 1. 양재동 말죽거리(마죽거리)는 현 양재역 부근에 있는 조선시대 자연마을의 명칭이다. 조선시대 인조 2년(1624)에 평안병사 이괄이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반군이 질풍처럼 개성을 지나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임금은 황망히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 때 인조 임금은 남한강 나루에서 배를 간신히 구해 한강을 건너 신사동의 새말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말죽거리에 이르자 목이 몹시 말랐다. 그 때 이곳에 사는 유생 김이 등 6, 7명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자 인조는 말 위에서 이 죽을 다 마시고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내려갔다. 그 뒤부터 임금이 말 위에서 죽을 마셨다는 뜻에서..
2011.10.12 -
삼성동
삼성동 유래(삼성동 주민센터)삼성동은 조선시대 자연부락인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삼성리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였고, 일제때 1913. 3. 1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확정때 삼성리라 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가 1963. 1. 1 법률 제1172호로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자연 부락으로 닥점, 무동도, 학동도, 배곶이 마을등이 있었는데 무동도는 마을 동쪽 한강 가운데있던 섬으로 무동도라 한 것은 이선 남쪽에 어린아이처럼 생긴 바위가 마치 춤추는 모습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한강 여러섬 가운데 유서깊은 섬으로 모래와 무성한 갈대, 울창한 수목이 가득하여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유명하였으나 강남지구 개발에 의해 자취마저 사라지고 푸른 강물만 말없이 흐르..
2011.10.12